2020. 3. 20. 21:20ㆍbooks
한 언어로 쓰이는 문학 중 그 언어의 진가가 가장 잘 드러나는 문학은 시가 아닐까 싶다. 언어라는 도구를 가장 세심하게 사용할 줄 아는 시인은 주변 사물과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포착하려 애쓴다. 언어의 특성상 표현해내고자 하는 바의 의미를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 제한하게 되는 제약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그 제약을 이용하기도, 뛰어넘기도 한다. 특히나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한국어를 다행스럽게도 모국어로 사용하는 나는 우리나라 말로 쓰인 시를 읽으며 그 시인이 읊어주는 시에 흠뻑 빠질 수 있다는 축복을 받았다.
중고등학교에서 국어 시간에 고전 시부터 현대시까지, 다양한 시를 읽었지만 그것이 내게 진정하게 ‘시’로 다가왔느냐 하면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다. 진정 시를 읽음으로써 시인이 보여주는 풍경과 펼쳐주는 세계관, 건네는 위로와 가슴 먹먹함을 온전히 음미하며 읽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하기야, 해야 하는 공부가 많았던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그렇기가 오히려 어려웠을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반기계적으로 읽었던 시들이 나도 모르게 어느샌가 내 마음의 양식이 되고, 그러지 못했던 것에 대한 마음속 깊은 갈증과 결부되어, 시를 온전히 이해하고 곱씹어보며 생각할 수 있는 여유로운 자세가 생겼다. 시를 읽으면서만 경험할 수 있는 사색과, 시간이 멈춘듯한 경험, 그 따뜻한 시간들을 이 시집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박준 시인은 때로는 일상적인 언어로, 때로는 “-입니다”와 같은 경어체로 끝나는 문장들로 그가 바라본 주변과 마음의 일들을 따뜻하게 표현해낸다. 그의 시들을 읽고 있자면 수줍고 과묵하지만 자신의 주변을 예민하고도 섬세하게 포착하는 한 사람의 모습이 그려지는데, 그에 대해서 좀 더 검색해보니 그는 그의 시를 두고 “머뭇머뭇거리다가 몇 마디 늘어놓고 안녕히 계세요 하고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오늘의 문예비평 2017년 여름호)이라고 표현했다. 내가 느낀 그에 대한 모습을 그가 함께 공유하고 있음에 놀랐고, 이 느낌을 이와 같은 언어로 표현해내는 그의 언어적 섬세함에 또 한 번 놀랐다.
그의 시들은 유독 과거를 돌아보고 회상하는 언어로 쓰인 시가 많다. 그는 과거를 돌아보지만 현재와 과거의 거리감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는 과거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결국은 잊히고 바래지는 세계가 아닌, 생생히 살아있으며 오히려 시간이 지나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을 더 발견하게 되어 날이 갈수록 풍성해지는 세계에 살고 있는 듯하다.
내가 원래 이렇게 울어, 어려서부터 그랬어, 청계천 양복점에서 일할 때 손에 기름은 늘 묻어 있지, 슬픈 생각은 자꾸 나지, 무엇으로 닦냐, 팔뚝으로 문질러가며 우는 거지, 이렇게 울면 우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아, 그때부터 버릇이 됐어, 하는 말 흘러.
이름이 왜 수영이에요, 왜 수영인 것이에요? 제가 수영이라는 사람을 오래 좋아했었거든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수영이가, 수영이가 그쪽 이름이 아니면 안 될까요? 하는 말 흘러.
[...]
그마저도 흐르르 흐르고 흘러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가지런히 발을 모으고 있는 말들.
<겨울의 말> 부분
그는 말들이 흐르고 흘러 다시 제자리에 도착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에게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 흐르는 중에 여기에 부딪히고, 저기에 부딪히며 강의 모양을 바꾸기도 하고, 다시 돌아와 기존에는 가지지 못한 것들을 새로 가지고 오기도 한다. 내가 들은 말, 내뱉은 말은 흐르고 흘러, 내 마음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새로운 깨달음이나 마음의 변화와 함께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우리가 오래전 나눈 말들은 버려지지 않고 지금도 그 숲의 깊은 곳으로 허정허정 걸어 들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쯤에는 그해 여름의 말들이 막 도착했을 것이고요
<숲> 부분
말들이 숲에 걸어 들어간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리는 듯하다. 오래전 나눈 말들이, 그해 여름에 나눈 말들이 오늘쯤에는 숲에 막 도착한다. 그 숲에서는 예전에 나눈 말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을 것이다. ‘숲’이라는 단어 속에서 포근함과 나무들이 조화롭게 서로를 이루고 있는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음을 생각해볼 때, 말들이 숲에 도착하면 비로소 그 의미가 완성되어 나를 이루고, 다른 말들과 함께 더 큰 숲을 이룬다. 우리는, 우리가 주고받은 말들이 영글 때 즈음 도착해서 결국에는 서로 조화를 이루는 숲 그 자체가 아닐까?
이렇듯 그에게 과거란 결코 현대와 동떨어져있지 않다. 과거는 언제나 현재와 맞닿아 있고, 현재와 함께 그 의미가 더 풍성해진다. 그렇다는 것은 곧 지금 살아가는 현재 또한 미래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현재를 온전히, 세심히 살아감은 이 현재도 언젠가는 미래의 나에게 있어 소중한 한 부분이 될 것이며, 미래의 나에게 띄워 보내는 유리병 속 쪽지다. 미래를 생각하며 현재를 살아간다는 그의 시간관 및 세계관은, 당장의 혹은 오늘 하루의 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문화가 만연한 시대인 요즘 더욱 빛난다.
책장을 넘기다
손을 베인 미인은
아픈데 가렵다고 말했고
나는 가렵고 아프겠다고 말했다
<손과 밤의 끝에서는> 부분
말 한마디에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어루만질 수 있다. 예민하게 상대의 마음을 생각한다. 아픈데 가렵겠다고 ‘나’를 배려하며 안심시키려는 상대에 말에 가렵고 아프겠다며 상대의 아픔에 집중하는 따뜻함을 보인다. 상대의 작은 차이를 인식하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따뜻하게 단어를 신중하게 선택하고 배열한다. 그가 보이는 사랑이 뜨겁고 열정적인 사랑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일지 몰라도, 그만큼 상대를 깊이 생각하는 마음이 시에서 돋보인다.
전체적으로 그의 시집을 읽고 있자면 조용하면서 생각이 많은 친구를 하나 둔 듯하다. 그는 말이 없고 무언가 물음에 대한 대답을 듣자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지만, 그만큼 깊은 생각에서 우러나온 진심 어린 몇 마디를 던지고 다시 자기 세계로 빠져들 것만 같다. 그렇다고 답답하거나 밉지는 않은 것이,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나를 향한 진심 어린 배려가 물씬 배어 나오기 때문이다. 나 또한 내가 하는 말들로, 내 생각의 언어들로 이러한 따스함을 품을 수 있을까? 시집 하나, 그것도 여러 작가의 시를 모아둔 것이 아닌 한 작가의 시집을 읽는 것은 처음이다. 그만큼 이 따뜻하고도 섬세한 시집으로 시집 읽기를 시작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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