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2020. 3. 31. 11:30books

 

1988년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이 책이 출간될 당시 원제 <노르웨이의 숲>으로 출간되었으나, 판매 실적이 매우 저조했다. 이에 1989년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되었다고 한다. 제목 덕인지는 모르겠으나, <상실의 시대>는 우리나라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하루키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일본 소설가’라는 타이틀까지 얻으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하루키는 번안한 제목보다는 원제 <노르웨이의 숲>을 이용해달라고 지속적으로 요청했고, 지금은 원제 그대로 출간되어 여전히 한국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도 어찌 보면 오역이다. <노르웨이의 숲>은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비틀스의 ‘Norwegian Wood’가 책 제목이 된 셈인데, 비틀스의 노래 가사를 잘 살펴보면 ‘Norwegian Wood’는 노르웨이산 목제 가구를 뜻한다. 하지만 그는 원제를 정할 때 Wood를 ‘木’이 아닌 ‘森’으로 쓰며 ‘노르웨이의 숲’이라 제목을 지었다. 대학에서 영미문학을 공부했고, 문체 또한 영미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하루키가 이 점을 몰랐을 리는 없었을 것을 생각하면, 적절한 시적 허용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개인적으로는 ‘노르웨이의 숲’이라 하면 어딘지 모르게 음침하고 습한 우울의 느낌이 소설의 줄거리와 맥락이 통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제목에서 준 그 이미지는 어쩌면 나오코의 요양 시설의 풍경과도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싶었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

죽음은 삶의 대극적인 존재 같은 것이 아니었다.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이미 갖추어졌고, 그런 사실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사랑, 죽음, 상실, 공허함과 방황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랑하는 것들의 죽음, 스러짐과 상실. 하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나와 내 주변 것들, 이 두 세계의 틈에서 오는 괴리감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다. 사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유한하며,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 또한 유한하다는 사실을 자주 잊은 채 살아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면, ‘나’라는 존재와 나를 둘러싼 세상이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다시금 느끼게 되며 속에서 알 수 없는 공허함을 느끼곤 한다.

 

와타나베의 가장 친한 친구인 기즈키는 갑작스럽게 죽었다. 창문 틈을 테이프로 막은 채 자동차 배기가스를 마시며 죽었다. 기즈키의 여자친구 나오코까지 해서 셋이서 곧잘 어울리곤 했으나, 기즈키의 죽음 이후 더 이상 나오코와 와타나베(‘나’)는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 그 둘에게 기즈키는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에 이제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자리했다. 둘 다 마음속 깊은 곳에 그의 존재를 느끼고 있지만, 함부로 떠올리고 언급하며 이야기를 나누기엔 그 이름이 가져올 혼란이 두려웠다.

 

나오코와 와타나베가 자게 될 때도 그랬다. 나오코는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기즈키가 의미하는 공허함, 죽음과 삶의 괴리가 시도때도 없이 나오코를 흔든다. 무언가 삶의 큰 부분을 잃어버린 듯 그녀는 문장을 구성하는 것도 어려워하며, 무엇이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지조차 혼란스러워했다. 그녀는 요양원에서 치료에 전념하고, 겉보기에는 회복하는 듯 보였으나, 결국은 회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은 다음에는 그의 전 남자친구 기즈키가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와타나베는 그와 정반대로 생기가 넘치는 미도리(일본어로 ‘녹색’이라는 뜻)와도 사귀게 된다. 미도리와 나오코 사이에서 와타나베는 다시 혼란스러워한다. 스스로는 나오코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자신의 옆에 있는 생명력 넘치는 미도리 또한 사랑한다. 이렇게 그는 사랑에 있어서도 또 하나의 혼란을 겪는다. 나오코의 요양원 룸메이트 레이코 씨가 자연스러운 것이라며, 그를 북돋아주지만 와타나베는 명쾌한 혼란의 해결을 얻지는 못한다. 아무튼 처음부터 끝까지 혼란의 연속이다.

 

나오코의 죽음은 이 소설의 클라이막스다. 나오코의 죽음 이전에 그 어떠한 언지도 주지 않는다. 와타나베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일인칭 소설이기에, 그가 갑작스럽게 나오코의 죽음 소식을 들었을 것과 같이 독자 또한 갑작스럽게 나오코의 죽음을 맞이한다. 미도리가 “너, 지금 어디야?”라는 수화기 너머의 질문에 와타나베는 대답하지 못하며 소설이 마무리된다. 우물쭈물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혼란스러워하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와 죽은 자와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진다. 기즈키는 열일곱인 채로, 나오코는 스물하나인 채로. 영원히."

 

나오코와 와타나베를 중심으로, 그리고 미도리를 함께 포함하여 줄거리를 요약했으나 이 이외에도 이 소설은 여러 요소들 속에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허와 고독, 방황으로 점철되어 있다. 여러 인물의 죽음이 나타나게 되는데, 기즈키의 죽음부터 나오코의 언니, 미도리의 아버지, 하쓰미(나가사와의 여자친구), 그리고 나오코까지, 이 중 대다수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결말을 맞는다. 미도리의 아버지 이외에는 그 죽음의 동기, 이유조차 잘 드러나지 않는다. 독자 입장에서는 서사가 진행됨에 따라 혼란스러움과 이유 없는 공허함, 고독을 맛보게 된다.

 

하루키의 작품의 특징이지만, 특히나 이 작품에서 성(性)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알 수 없는 공허함을 느낄 때 인간이 가장 쉽게 탐닉하게 되는 것은 육체의 욕망이기 마련이다. 그 중에서도 성욕은 특히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는 물처럼, 그 순간의 달콤함과 함께 공허함, 알 수 없는 외로움을 가져다주는 장치로서 이 소설의 서사를 이끌어간다.

 

성관계라는 장치를 거론함에 있어서 나가사와를 빼놓을 수 없다. 나가사와 선배는 겉보기에는 완벽한 청년이나, 결국에는 그 역시 속 빈 깡통과 같다. 그의 수많은 성관계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며 터부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나가사와 스스로도 그의 행동에 대해 명쾌한 설명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정복해가는 것’,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말들로 포장하지만 결국 ‘난 원래 이런 사람’이란 말로밖에 스스로를 포장하지 못한다. 여자친구 하쓰미에게 상처만 주다가,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드러나지는 않지만 하쓰미도 결국 자살하고 만다.

 

성관계와 그 묘사가 나올 때마다 결국 근본적인 공허함과 문제의 해결은 이끌어내지 못한다. 하루키의 성 묘사는 그의 작품이 호불호가 갈리게 되는 요소 중 하나인데, 이 책을 두 번 읽은 나 또한 이로 인하여 이 작품에 실망하기도 했다. 소설 말미에 레이코 씨와의 성관계 때문인데, 레이코 씨와마저 성관계를 하고야 마는 와타나베의 모습에 가벼움, 실망감을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두 번째로 읽었을 때에는, 그것이야말로 하루키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였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모두 이유 모를 공허함에 괴로워한다. 이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의 성행위는 이유모를 공허함으로부터 비롯된 혼돈, 그리고 게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과도 같은 것이다. 어쩌면 ‘애초부터 그것이 성(性)의 본질이다’,라고 하루키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명제에 동의하고 싶지는 않으나, 우리 주변의 성문화를 살펴보면, 과연 부정할 수 있을까 싶다.

 

연극사를 공부하는 와타나베라는 설정으로부터 잠깐씩 그의 수업 내용이 소설 속에 등장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설명하던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쓰인 무대 기법의 하나. 기중기와 같은 것을 이용하여 갑자기 신이 공중에서 나타나 위급하고 복잡한 사건을 해결하는 수법이다.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도저히 해결방안이 보이지 않는 혼돈 상황이 있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는다. 그때, 무대 밖 전지전능한 권위자가 나타나 상황을 해결한다. 자, 너는 여기로 잠깐 비켜서봐. 너는 저기로, 너는 다시 여기로. 모든 상황을 해결하고 홀연히 사라진다. 고대 연극의 수법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대해 배우는 장면이 괜히 삽입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소설 속에서 그러한 존재가 간절히 필요할 정도의 혼돈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소설은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이 역할을 어느 정도 수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없다. 혼란 속에서 느끼는 고독, 외로움, 성장을 독자는 와타나베의 눈으로 함께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다’라고 하루키는 말하는 듯하다.

 

‘상실의 시대’ 또한 정말 잘 지은 제목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도 주변 것들의 죽음과 상실로,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공허함과 고독을 느끼며 살아가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들로 인하여 우리는 고통스러워하지 않나? 힘들긴 힘든데, 괴로워서 해결하고 싶은데, 그 이유와 해결방안을 알지를 못한다. 누군가가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 방안을 제시한다 해도 내가 스스로 깨닫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외롭고, 스러져가는 것들에 대해 불안해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몇 개의 대사가 우리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준다.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존재하고 이렇게 네 곁에 있었다는 걸 언제까지나 기억해 줄래?”

나오코

“자신을 동정하지 마. 자신을 동정하는 건 저속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야.”

나가사와

 

기억하면 된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들은 가슴에 품고 기억하면 된다. 언제까지나 기억하며 삶을 살아내면 된다. 그리고 스스로를 동정하지 않으면 된다. 스스로를 동정하는 데에는 끝이 없다. 공허함의 구렁텅이로 나를 밀어 넣는 것도, 그 구렁텅이로부터 나를 끌어내는 것도 ‘나’다. 그러한 과정을 우리는 ‘성장’이라고 부른다. 주인공을 통해 현대인의 고독과 방황을 가감 없이 맛보며, 독자 개개인이 그 과정 속에서 충분히 깊게 생각하고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는 책이라는 점이 이 책이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